[조이뉴스24 권혜림 기자] 개봉한지 9개월이나 지난 영화가 박스오피스 차트에 새로 진입했다. 멀티플렉스 극장의 예매율 순위에서도 상위를 지키고 있다. 영화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감독 변성현, 제작 CJ 엔터테인먼트, 폴룩스(주)바른손, 이하 불한당)의 이야기다.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 19일 '불한당'은 1천865명의 전국 관객을 동원해 일일 박스오피스 10위에 올랐다. 좌석점유율은 14.3%, 8위를 기록했다. 멀티플렉스 극장 체인 메가박스의 실시간 예매율 차트에서는 쟁쟁한 새 개봉작들을 제치고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예매율 1위는 '블랙 팬서', 3위는 '골든슬럼버'였다. 지난 20일에는 박스오피스 14위(일일 관객 1천466명), 메가박스 예매율 3위를 차지했다. '불한당'은 지난 2017년 5월 개봉작이다. 9개월 전 이미 개봉한 작품이 차트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어떻게 된 일일까.
메가박스는 지난 19일부터 '복 터지는 새해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이벤트 상영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그것만이 내 세상' '1987' '강철비' '타이타닉' '불한당'까지 총 5편의 영화를 오는 28일까지 각 할인된 가격(최저 5천 원)에 관람할 수 있는 이벤트다. '불한당'이 박스오피스 10위, 예매율 2위에 올랐던 19일은 이 행사가 시작된 첫 날이었다.
이벤트 상영이 결정된 다섯 편의 영화들 중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한 작품은 '불한당'이 유일하다. '그것만이 내 세상'은 지난 1월17일 개봉해 33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공식 상영 막바지에 왔다. '강철비'와 '1987'은 나란히 지난 연말 개봉해 각각 440만 명, 7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며 흥행했다. 20주년을 맞아 지난 1일 재개봉한 '타이타닉'은 명작으로 손꼽히며 두루 사랑받아 온 작품이다.
'불한당'이 이번 재상영작 리스트에 포함된 사실이 자칫 의아하게 느껴질 법하지만, 맥락이 있었다. 영화 팬덤의 증명된 충성도가 재상영 결정 과정에 반영됐다는 것이 극장 측 설명이다. 대형 멀티플렉스 체인이 흥행에 실패한, 무려 개봉한지 300일이 다 되어가는 구작(舊作)을 다시 상영하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스스로를 '불한당원'으로 칭하는 팬덤의 활약이 있었다.
메가박스는 조이뉴스24에 '불한당' 재상영을 결정하게 된 이유를 알리며 "'불한당'은 단체 관람 문의를 비롯해 SNS과 커뮤니티 등에서도 상영에 대한 고객들의 니즈가 많은 작품으로, 이를 반영해 이벤트에 포함시키게 됐다"고 알렸다. 영화의 배급과 제작을 맡았던 CJ엔터테인먼트 역시 "그간 '불한당'은 마니아 관객들에 의해 대관 행사가 꾸준히 있었고 좌석 점유율도 매우 높았다"고 답했다.
'불한당'은 지난 2017년 5월 개봉 후 공식 상영이 마무리된 당시 약 89만 명의 총 관객을 동원했다. 2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됐던 손익분기점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이다. 대규모 재개봉의 경우를 제외하면, 공식 상영 종료 이후 상업 영화의 총 관객수에는 통상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불한당'의 경우는 달랐다. 개봉 시즌 상영이 끝난 이후에도 관객수가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증가 관객수의 단위는 백에서 천이 됐고, 어느덧 만이 됐다. 지난 20일을 기준으로 '불한당'의 누적 관객수는 94만여 명. 상영 종료 당시 기록한 89만 명에서 지난 9개월 간 약 5만 명이 늘었다.
그 바탕에는 개봉 당시부터 지금까지 영화의 얄궂은 운명과 함께 해 온 마니아 관객, '불한당원'들의 적극적 소비 행위가 있었다. 영화는 개봉 직후 감독의 SNS 논란이라는 부정적 이슈에 휘말렸고 평점 테러의 타깃이 됐다. 상영관 수는 급격히 감소했고 '퐁당퐁당'이라 불리는 교차상영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저마다의 이유로 이미 '불한당'에 '감긴(감다, 극 중 상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는 의미로 쓰인 은어)' 관객들은 공식 상영이 마무리된 뒤에도 전국구 대관을 이어갔다. 아쉬움을 달래는 방법이었다. 개봉 당시 상영관을 놓쳤던 영화는 팬들이 직접 마련한 스크린에서 다시 상영되기 시작했다. 작지만 꾸준히 관객수가 증가했던 이유다.
'불한당원'들의 'n차 관람'과 이들의 교류는 영화에 대한 풍성한 해석으로 이어졌다. 서사는 '불한당원'들에 의해 자유롭게 전유됐다. 주요 캐릭터 재호(설경구 분)와 현수(임시완 분)의 관계, 병갑(김희원 분)의 정서는 물론, 극 중 인물들의 모든 대사와 행동들이 '불한당원'들에 의해 섬세하게 관찰되고 분석됐다.
캐릭터에 대한 팬덤의 깊은 이해와 애정은 이를 소화한 배우들, 그리고 창작의 중심에 선 감독을 향한 '팬심'도 낳았다. 아이돌 출신 배우 임시완의 기존 인기 위에 '불한당' 속 연기에 대한 지지가 더해졌다. 출중한 베테랑 배우의 포지션에 서 있던 설경구에겐 '지천명 아이돌'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매 행사마다 구름떼같은 팬들을 몰고 다니는 그의 모습을 보면 '아이돌'이라는 표현에 결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병갑 역을 맡아 가슴아린 순애보를 그린 김희원, 기존의 한국 느와르 영화에선 본 적 없는 여성 캐릭터 천인숙 역을 연기한 전혜진도 '당원'들의 애정 공세 대상이었다. '불한당원'들에게 '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변성현 감독 역시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관객과의 대화(GV)에 참석해 열띤 반응을 얻었다.
'불한당원'들 사이의 공공연한 목표는 영화의 '100만 관객 돌파'다. 상영 종료 후 대관으로나 볼 수 있었던 영화가 뒤늦게 전국 극장에서 다시 관객을 만나게 됐으니 꿈에 한 발 더 가까워진 셈이다. 기회를 만났다는 듯, '불한당원'들 사이에선 아직 '불한당'을 만나지 못한 예비 관객들에게 예매 티켓을 선물하는 나눔 활동도 활발하다. '불한당'과 '불한당원'들이 영화 흥행사의 새 페이지를 쓰는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냉정한 시장에서 불운을 만난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생명력을 피워낼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불한당'은 더없이 창조적인 답안이다. 한 편의 영화를 향한 관객들의 애끓는 애정과 지지가 어떤 기적을 만들 수 있는지 물을 때에도, 그 답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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