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권혜림 기자] '더 테러 라이브'의 충격은 거셌다. 이름이 생소한 신인 감독과 이미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배우 하정우의 만남이 놀라웠다면 그건 예고편에 불과했다. 물리적으로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재주는 신인의 것 같지 않게 탁월했다. 메시지에 대한 강박도, 서스펜스를 위한 과도한 장치도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모든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제 자리에서 기능했다. 장르나 속도감과는 별개로,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차분하게 풀어놓는 느낌이었다.
감독이 5년 만에 내놓은 신작 'PMC: 더 벙커'(감독 김병우, 제작 퍼펙트스톰필름, 이하 PMC)는 소재에서도 주제에서도 데뷔작 '더 테러 라이브'로부터 한 발짝 더 나아간 작품이다. 더 본격적이고, 실험적이며, 과감하다. 성공적 데뷔작을 선보이는 데 힘이 됐던 배우 하정우가 이번에도 함께다.

지난 2018년 12월26일 개봉한 영화는 글로벌 군사기업(PMC)의 캡틴 에이헵(하정우 분)이 CIA로부터 거액의 프로젝트를 의뢰 받아 지하 30M 비밀벙커에 투입되어 작전의 키를 쥔 닥터 윤지의(이선균 분)와 함께 펼치는 리얼타임 생존액션 영화. 한국영화로는 최초로 글로벌 군사기업을 중심 소재로 삼았다. 이미 스크린에서 친숙한 남북 갈등 배경이 소재로 인해 신선하게 다가온다. 베테랑 배우 하정우와 이선균을 중심에 뒀다.
영화의 개봉을 맞아 조이뉴스24와 만난 김병우 감독은 '더 테러 라이브'를 처음 선보였던 5년 전과 'PMC'로 관객을 만나게 된 지금을 비교했다. 3월 초 크랭크업, 7월 개봉 일정을 맞춰야 했던 '더 테러 라이브' 개봉 당시를 떠올리며 "아쉬움이 많았다"고 말한 그는 "이번엔 후회가 없다"고 단단하게 답했다. 영화의 후반 작업에 약 1년의 시간을 투자한 데서 오는 자신감이었다.
언론 배급 시사 직전까지도 쉼 없이 장면 곳곳을 살펴본 그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다"고 말하며 웃어보였다. 그는 "영화는 결국 자기 생긴대로 나오기 마련"이라며 "무얼 하려고 했는지보다는, 만드는 이의 모습 자체가 그대로 투영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병우 감독을 만나 'PMC' 작업에 얽힌 이야기들을 나눴다.

이하 'PMC' 김병우 감독과 일문일답
(이하 본문에는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PMC'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다. 남북 정세가 중요 소재인 만큼 시대나 상황 설정 모두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에서 고민의 대상이었을 것 같다.
"벙커가 기본적으로 가상의 공간이다. 시대도 현재가 아닌 2024년이니 가상의 시공간 안에서 현실감을 최대로 부여하려 했다. 극 중 시대를 몇 년 뒤로 미룬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금을 배경으로 하면 관객이 몰입하기에 덜컹일 수 있겠더라. '여차저차 해서 2024년에는 이런 상황이 됐다'고 한다면 조금 더 쉽게 수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극 중 북한의 최고권력자는 '킹'으로 불린다. 애초 시나리오 단계에서도 실제 이름이 아닌 '킹'으로 설정했다.
"그렇다. '김정은'이라 지칭하는 순간 오히려 관객의 몰입을 해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세계에선 '킹'이라 불린다'고 설정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2018년 봄부터 본격적인 변화가 시작됐지만, 영화를 준비하는 동안 남북 정세가 지속적으로 달라졌을 것이다. 고민이 컸을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다.(웃음) 우리가 촬영을 할 땐 미사일을 쐈었다. 뉴스 멘트를 고치긴 해야겠다 싶었다. 이후 CG가 계속 바뀌니 추이를 지켜보다 11월에 극에 가장 먼저 나오는 뉴스 멘트를 다시 찍었다. 깊게 하나 하나 맞춰갈 것은 아니었으니 어느 정도 터치해 벙커 안으로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정치, 시사성을 굉장히 크게 띠고 있는 영화가 아니고 오락영화, 장르영화 안에서 어떻게 하면 벙커 안의 2024년 배경으로 잘 들어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기존 한국영화에서 다룬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다르게 접근하고 싶었다. 한발짝 뒤에서 보면 남북만이 아니라 미중 관계 역시 존재하지 않나. 그런 점을 확실하게 보려 했다. 어쨌든 궁극적으로는 남북 이야기가 아니라 강대국의 이권싸움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 나가려는 개개인의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극 중 에이헵은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에 의해 자연스럽게 국적이 지워지고, 윤지의 역시 말씨를 제외하고는 대화의 맥락이나 캐릭터 자체에서 '북한 사람'이라는 특징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인물로부터 국적이 보이지 않게 설정한 것도 의도적이었는지 궁금하다.
"국적을 지우려 했다. 윤지의의 경우 일부러 북한인이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없는 것 같더라. 상황이나 인물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개인일 뿐인 윤지의가 대체 뭐라고 북한을 대변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했다."
-지난 10년 간 할리우드에선 대테러전을 소재로 한 수 편의 수작들이 등장했었다. 한반도 역시 일촉즉발의 정세를 지닌 땅으로 읽혀왔는데 'PMC'를 만들며 특별히 집중한 지점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시나리오를 쓸 때도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야말로 분쟁의 여지가 큰 곳이지 않나. 이 상황을 한반도 땅덩어리 안에서 말고, 세계지도를 펼치고 보면 다른 것이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나라, 민족, 동포 같은 키워드가 아니라 시야를 더욱 넓혀 봤을 때 북한이란 국가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싶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감독의 정치관도 궁금해졌다.
"정치관이랄 것이 없다. '여당이냐, 야당이냐' 같은 것 말인가?(웃음)"
-아니다. 전쟁과 국제 정세를 향한 감독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개인주의적인 입장이다. 영화 초반에 로건의 대사 중 마트 앞에서 부랑자가 죽어갈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지 않나.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면 잘 되느냐'보다는 개개인의 의식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려 했다. 영화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다뤄지는 것이 에이헵의 내면 갈등이지 않나. 윤지의 대사에서도 '전부 자기 혼자 살겠다고 해서 전쟁이 난 것 아니냐'고 묻는다. 개개인의 사회적 인식, 도덕성을 묻는 것에 중점을 맞춘 면이 있다."

-에이헵은 굉장히 입체적이고 인간적인 캐릭터다. 살생이 업인 사람이지만 가족을 끔찍이 여긴다. 작전 성공과 부하들을 향한 책임감 사이의 갈등 역시 그 입체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찌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에 임하고 있는 셈이다. '현장 일'을 하고 있는 거다. 심각한 군사 작전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겐 '오더 받고 일하는' 직업인의 마인드가 있을 것이다. '밖에선 험한 일을 하지만 집엔 다들 가족이 있는' 그런 모습 말이다. 겉으론 무자비해보이지만 사람인지라 인간적 면모도 각자 있지 않겠나.
나는 'PMC' 속 하정우의 모습을 처음 본 관객들이 '내가 아는 하정우의 얼굴'이라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어,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데?'라고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 겉모습도, 언어도, 주변 사람들도 생소한 느낌이지 않나. 겉으로는 건들건들한 용병 같은 모습이지만 작전 투입 직전 아내와 통화를 할때랄지 굉장히 개인적인 모습이 보이는 순간이 있다. 그런 터치들을 통해 영화 안에서 관객과 에이헵의 거리감을 좁혀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최종에 와서는 관객이 에이헵을 친구처럼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이 이 영화를 재밌게 보는 방법 아닐까? 그가 추악한 실수를 하는 장면도 있고 비정하고 매정한 모습도 보이지만, 이후 자신이 저지른 짓을 보며 후회도 하고 다시 한 번 다짐도 한다. 그런 모습을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체험하며 보게 된다면 어떨까 싶었다. 에이헵은 같은 질문을 받고 다른 답을 하지 않나. 관객이 그 때 훨씬 응원하고 지지하고 박수쳐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더 테러 라이브' 속 윤영화의 화장실 흡연 신에 이어 이번엔 출동하는 에이헵이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며 걷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복도에서 담배를 끌 줄 몰랐는데 '탁' 끄더라. 총을 바로 장전해야 하니 빨리 떨궈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지점에서는 나 역시 '더 테러 라이브'의 화장실 신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뭐랄까, 출격 직전 한 대 피우는 느낌이라는 점에서 비슷했던 것 같다. 실제 하정우 선배는 최근 담배를 거의 피우지 않는다."
-정말 많이 들은 질문이겠지만, 다른 배우를 주연으로 삼아 이야기를 펼치고 싶은 생각은 없나.
"나는 배우 뿐 아니라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을 구성할 때에도 '잘 하는 사람'과 하고 싶다. 다른 이야기일 수 있는데, 누군가는 내게 '왜 이런 영화 찍냐. 다른거 해볼 생각 없냐'고 한다. 전혀 없다. 내가 잘 할 줄 아는 것을 잘 다듬어서 더 재밌게 보여드리는 게 내 할 일 같다. 하정우와 계속 작업하고 싶어하는 것도 그런 차원 아닐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굳이 일부러 다른 선택을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모든 장르의 영화를 다 섭렵할 필요가 없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그런 분들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 계속 이것만 죽어라 파는 것이 나은 것 같다."
-창작자들 중에도 머릿속에 아주 여러가지의 이야기를 시작해 둔 뒤 끌리는 순으로 이를 발전시키는 타입이 있고 오로지 하나의 이야기를 파고드는 경우가 있던데, 김병우는 후자인가보다.
"전자의 경우는 낚싯대가 여러 개라서 '하나만 걸려라' 할 수도 있는 분들이다. 하지만 나는 낚싯대가 하나다.(웃음)"
-결말 속 에이헵의 행동을 통해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궁금하다.
"시나리오 쓸 때 이 단어를 많이 썼다. '구원'이었다. 거창한 표현일 수 있는데 윤지의를 구하는 것이 에이헵에겐 사실 '나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차원에서 에이헵은 윤지의에게 고맙다고 한 것이다. 아마 그가 죽었다면 더 나락으로 빠지지 않았을까. 영화를 시작할 때 '두 명으로 끝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작에선 한 명이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하면 두 명이 남을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세계가 다시 혼란에 빠진다 해도 상대를 구함으로써 결국 스스로를 구원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결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도 큰 상관이 없을 것 같다. 초반에 로건이 말하지 않나. '오늘 전쟁이 나도 이 사람을 구할 거냐'고. 결말에서 똑같이 그 질문을 다시 던져주고 싶었다. 심지어 에이헵의 6년 전 기억과 똑같은 상황이다. 낙하산이 떨어지고, 핵미사일이 폭발한다. 에이헵은 '세계는 난장판이 될 텐데 그럼에도 이 사람을 끌어올릴 수 있어?'라는 질문에 답을 생각하게 된다. 이후 국제정세가 복잡해지고 전면전이 시작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에이헵이 윤지의를 구했다는 것, 스스로 구원받았다는 차원에서는 결국 마지막에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