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기대가 만족을 불러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밀회'의 주인공으로 배우 김희애와 유아인이 낙점됐을 때, 기대는 이미 예상을 앞질러갔다. 그러나 지난 2개월, 두 배우는 만족을 넘어선 극찬을 자아내며 브라운관을 누볐다.
JTBC 월화드라마 '밀회'가 지난 13일 16부로 막을 내렸다. 지난 4월 첫 방송된 이후, '밀회'는 종합편성채널과 지상파 드라마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또 하나의 선례가 됐다. KBS 2TV 드라마 '태양은 가득히'의 시청률을 앞선 것은 물론, 체감 인기 또한 남달랐다. JTBC '아내의 자격'을 통해 불륜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 간에도 '격'이 있음을 알려 준 안판석 감독과 정성주 작가는 '밀회'로 다시 저력을 입증했다.
빼놓을 수 없는 일등공신은 극 중 20세 차 사랑에 빠져든 배우 김희애와 유아인이었다. '밀회'는 완벽한 커리어우먼이자 유부녀인 40세 여성 오혜원(김희애 분)과 20세의 가난한 천재 피아니스트 이선재(유아인 분)의 이야기다. 예술 재벌 서한그룹 일가와 두 남녀의 얽히고 설킨 사건들이 흥미로운 서사가 됐다. 상류층의 권력놀음에 휘말린 혜원과 선재의 사랑은 두 배우의 열연을 통해 입체적으로 살아났다.
타고난 미모와 우아한 분위기부터 오혜원의 외양과 꼭 맞아 떨어진 김희애는 매 작품 캐릭터와 혼연일체가 된 연기를 선보여왔다. 그에게 금기의 사랑에 빠져든 오혜원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지난 10년 간의 필모그라피만으로도 김희애의 연기력은 어렵지 않게 설명된다. 적반하장의 불륜녀(SBS '내 남자의 여자'), 현명한 어머니(KBS 2TV '부모님 전상서'), 아슬아슬한 사랑에 눈을 뜬 여린 주부(JTBC '아내의 자격'), 막대한 재벌가의 엘리트(SBS '마이더스')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오갔다.
'밀회'의 오혜원은 상류 사회의 일원이 되고픈 욕망으로 학창 시절부터 서한그룹 회장 서필원(김용건 분)의 딸 서영우(김혜은 분)를 가까이 뒀다. 사고뭉치인 영우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서한그룹의 녹을 먹었다. 바라던대로 영우와 함께 유학길에도 올랐다. 젊음의 패기, 그 파릇파릇한 자존감을 버리고 얻은 것들이란 그룹 실세들의 절대적 신임이었다. 서필원의 아내이자 영우의 새어머니 한성숙(심혜진 분) 역시 그를 한껏 이용했다. 그들의 말마따나 혜원은 서필원과 한성숙, 서영우의 삼중첩자였다.
재단 예술재단의 기획 실장으로서 오혜원은 누가 봐도 반듯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완벽한 처세술, 우아한 미모, 온화한 성격을 갖췄다. 서한음대 피아노과 교수 강준형(박혁권 분)과는 금슬 좋은 쇼윈도 부부로 살아왔다.
그러나 순수한 청년 선재를 만난 혜원은 한참을 잊고 지냈던 사랑에 새로이 눈을 떴다. 설렘도, 질투도, 제 안의 성적 욕망도 아낌없이 껴안게 됐다. 선재와의 만남은 오혜원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입체성을 정점으로 끌어올렸다.
김희애의 연기도 충실히 이를 따랐다. 어떤 모욕 앞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던 혜원은 선재를 만난 뒤 치욕을 부끄러워할 줄 알게 됐다. 화려한 껍데기에 만족하며 제 삶을 운명처럼 받아들여 온 그가 온 몸으로 변화를 느꼈다. 질투심과 분노로 가득한 목소리가, 서러운 오열이 김희애의 몸을 통해 그려졌다. 완벽한 외모엔 강단이, 처연한 눈빛엔 연민이 담겼다. 자신을 옥죄는 권력 앞에서 태연한 미소를 짓다가도 일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은듯 체념한 얼굴을 하는 그의 연기엔 감탄이 아깝지 않다.
16화 후반에 등장한 오혜원의 변론 장면은 구차한 설명이 필요 없을 김희애의 내공을 다시금 확인케 만들었다. "오직 저 자신에게만 집중하려고 합니다"로 담담히 시작되는 그의 연기는 완벽하다고 평할 수 있을 법한 '밀회'의 엔딩을 완성한 지점이었다.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머리카락을 잘리는 장면 역시 다르지 않았다. 울음과 웃음, 치욕과 홀가분함이 교차하는 그의 얼굴은 허울을 벗어던진 오혜원의 것 자체였다.
그런가 하면 유아인에게 '밀회'의 이선재는 신의 한 수였다. 그간 반항기 어린 청년 연기를 자주 선보였던 그는 절정의 순수함과 천재적 재능을 오가며 선재의 얼굴을 그려나갔다.
유아인의 열연은 음악을 소재로 한 기존 한국 드라마와 차원이 다른 리얼리티로 빛이 났다. 수도 없이 등장한 피아노 연주 신마다 그는 직접 악보를 외우고 타건을 했다. 어느 각도에서 잡아도 어긋남 없는 장면들이 완성됐다. 연주에 흠뻑 취한 듯한 표정과 움직임이 몰입을 도왔다.
19세 차 배우 김희애와 호흡에서는 나이차가 무색했다. 남다른 합을 자랑한 피아노 연탄, 충동적이었던 키스를 잊으려 하는 오혜원에게 "원래 남의 여자 관심 없는데"라고 일갈하는 장면, '피아노맨'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혜원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얼굴 등은 오래 기억될 명장면이었다.
순수해서 솔직하고, 그래서 더 저돌적인 이선재는 절제된 연기를 선보일 줄 아는 유아인에게 꼭 맞는 옷이었다. 극의 초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하던 선재가 혜원이 보낸 브뤼노 몽생종의 책 '리흐테르’를 읽으며 오열하는 장면은 상상 이상의 폭발력이 읽힌 순간이었다.
이후 혜원과 재회한 선재가 절망 가득한 얼굴로 "어차피 다 지옥이니까"라며 읊조리고, "제가 돌아버리잖아요"라며 키스를 퍼붓는 장면 역시 한껏 힘을 뺀 유아인의 연기로 에너지를 얻은 신들이었다. 동경과 호기심, 종국엔 연민과 사랑으로 나아간 선재의 감정선이 배우의 숨결과 하나가 됐다.
그 나이대 청년들이 흔히 구사하는 어휘에 선재만의 통찰력이 버무려진 대사들도 유아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가난을 부끄러워 않는 곧은 성품,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맑은 영혼을 지닌 이선재는 유아인을 만나 생명력을 얻었다.
유아인은 군 입대 전 마지막 드라마 작품으로 '밀회'를 선택했다. 후회 없을 결정이라 봐도 무방하다. 아역 배우로 연기에 발을 들인 뒤 그간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색깔의 연기를 물 만난듯 소화했다.
치밀한 연출과 유려한 영상미, 흥미진진한 서사가 출중한 두 배우의 연기를 통해 제대로 빛을 봤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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