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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소설] 자화장 <8> - 정찬주


조이뉴스24가 단편소설을 연재합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브런치가 있는 카페에서 깊이와 재미를 더한 소설을 즐기며 하루를 준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림자와 칼」로 아침소설의 문을 연 정찬주 작가가 두 번째 작품 「자화장」을 선보입니다. 작품은 수행자들이 용맹정진하는 절집이 배경이지만, 종교와 무관하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자아의 본질을 되새기게 하는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편집자]

법계사 뒤쪽 등산길인 천왕봉 가는 길부터는 바람이 거셌다. 매서운 바람이 쌓인 눈을 다 파헤칠 듯 불어 젖혔다. 흩날리는 눈가루가 우멸과 우명의 눈을 찔렀다. 얼마나 불어 젖혔는지 쌓인 눈이 바람에 쓸리어 등산길이 거무튀튀하게 보였다. 낯익은 소나무와 잣나무들은 적설을 뚫고 우뚝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너덜겅 돌길을 산짐승처럼 기어서 건넜다. 그런데 구상나무 숲속에 들어서서는 평소와 달리 안도했다. 누군가가 비로암 초입까지 노란색 천 조각을 나무에 매달아놓아 헤매지 않았다.

'은사님께서 달았을까?'

우멸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은사 법성은 등산객이 비로암에 오는 것을 몹시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비로암 풍경소리가 뎅그랑뎅그랑 들려오자 우명이 말했다.

"사형님, 은사님이 계신 것 같습니다."

"비로암은 늘 바람이 좀 있다네."

우멸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법성이 인기척을 느끼고 인법당 문을 열고 나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비로암은 풍경소리만 날 뿐 적막했다. 법성의 흰 고무신 한 켤레는 툇마루 밑에 놓였고, 눈 쌓인 마당에는 산짐승 발자국만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우멸은 인법당 문을 열었다. 바깥의 날빛에 반사된 비로자나불이 부드러운 빛을 발했다. 우멸과 우명이 삼배를 올렸다. 그러나 인법당도 곧 적막해졌다. 법성의 작은방도, 우멸이 머물렀던 골방도 적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멸이 잤던 골방 방바닥에는 쥐똥이 검은콩처럼 굴러다녔다. 개켜놓은 이부자리 속에서 들쥐라도 튀어나올 듯했다. 우명이 툇마루에 걸터앉더니 말했다.

"사형님, 은사님께서 인연처를 찾아서 떠나신 것이 아닐까요?"

"그러셨을 것 같지는 않네."

우멸은 밖으로 나와 비로암을 한 바퀴 돌았다. 혹시라도 변고를 당하지 않았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뒤뜰 굴참나무도 둥치가 베어진 채 그대로 있었다. 변한 것은 장작 나뭇단만 사라졌을 뿐이었다. 삭정이 나뭇단도 줄어든 것이 없었다. 군불을 지피는 부엌 아궁이는 불을 들인지 오래된 듯 습했다.

우멸은 우명의 손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산돌로 둘러쳐진 텃밭으로 나갔다. 우멸의 직감으로는 텃밭 끝에 있는 널따란 반석이 수상했다. 산바람이 쓸었는지 반석에는 잔설이 몇 줌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반석 앞으로 다가갔다. 과연, 반석 위에는 타다만 숯덩이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우멸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챘다. 암자 부엌 옆의 장작 나뭇단이 사라진 이유였다. 법성이 장작더미를 만든 뒤, 그 위에 눕거나 가부좌를 틀고서 스스로 불을 붙인 것이 분명했다. 그제야 우명도 눈치를 챘다. 반석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우멸은 담담했다. 월적이 입적했을 때 ‘슬퍼하지 마라. 사람은 누구나 이별한다’라는 말이 전광석화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우멸이 말했다.

"은사님께서는 당신 뜻대로 입적하셨네. 자화장(自火葬)이란 말을 들어보긴 했지만 은사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실 줄은 몰랐네."

"은사님께서 아금종생사(我今終生死)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군요."

"맞네."

우명은 마음을 추스린 듯 법성의 편지 한 구절을 말했다. 두 사람은 반석 위로 올라가 숯덩이들을 들어내고 손바닥으로 잔설도 조심스럽게 치웠다. 두 사람 모두 처음으로 경험하는 습골(拾骨)이었다. 우멸이 곧 누런 뼈 조각 두 개를 발견했다. 잠시 후에는 우명이 소리쳤다.

"사형님, 사리가 있습니다."

우멸이 쪼그려 앉은 우명 쪽으로 다가갔다. 물방울만한 사리였다. 모두 다섯 과로 붉은색, 푸른색, 하얀색, 황금색 사리들이었다. 우명이 사리를 수습한 뒤 우멸에게 건넸다.

"비로암에 모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우명스님, 그건 은사님 뜻이 아니네."

"그럼 무엇이 은사님 뜻인가요?"

우멸은 손에 쥔 사리 다섯 과와 유골 조각 두 개를 멀리 휙 던져버렸다. 텃밭 너머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우명이 비명을 질렀다.

"사형님, 무슨 해괴한 짓입니까!"

"은사님께서 사리 같은 것은 줍지 말라고 말씀하셨네. 누구나 지수화풍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라고."

"사형님..."

"부질없는 짓이네. 여기 지리산 나무와 풀들이야말로 은사님의 생사리가 아니겠는가."

우멸이 말한 생사리란 말에 우명이 무릎을 꿇었다. 우멸이 도리질을 했다. 그래도 순진무구한 우명은 막무가내였다. 우멸에게 삼배를 올렸다. 조금 전까지는 사형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스승의 예를 갖추겠다는 듯 절을 했다. 이후 우멸은 '못난 놈!'이란 의심에 다시 걸리지 않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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